제목: 페인트
저자: 이희영
주제분류: 청소년문학
출판연도: 2019
부모를 선택하는 시대, 내 손으로 색칠하는 미래.
1. 중의적인 제목
당연히 미술에 사용하는 페인트일 줄 알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NC 센터의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거쳐야 하기에, 이를 은어로 '페인트 하러 간다'라고 한다는 내용을 읽었을 때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참신한 설정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단어가 생길 정도로 책 속 미래사회에는 부모 면접이 흔한 일이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내 유년은 회색이었다. (p199)
그래서 제목이 《페인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속 NC 센터 아이들은 내 손으로 미래를 색칠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인트'는 아주 적합한 은어네요.
2. 현재의 문제점을 부각해 만든 이야기
읽는 내내 소설은 현재의 문제점을 부각해 만든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 "슬로건은 콤플렉스다"라고 썼던 칼럼도 떠오릅니다.
1)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사회
출산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말을 언제부터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아니 5년 전에도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으니, 출산율 저하는 정말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책 속의 미래 사회 역시 아이를 잘 낳지 않고, 낳아도 키우지 않으려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가장 예쁜 짓을 할 때인 다섯 살 정도의 어리고 귀여운 아이들을 주로 입양하였습니다. 입양 가능 연령을 높이자 힘들여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어 오히려 더 NC센터에 관심을 보입니다.
2) 돌봄 사회
보육 수당을 지급해 온 것은 오래전부터 이고, 올해부터 초등학교에는 부모의 맞벌이 여부와 상관없이 무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늘봄학교, 미래형 맞춤형 프로그램이 생겼습니다. 늘봄학교 보육시간을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로 늘리는 것이 현재 정책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책 속 주인공 제누 301이 사는 곳은 NC 센터입니다. 제누 301 같은 아이들은 국가의 아이들(nation's children)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기를 원치 않을 때 국가에서 데려다 키우는 것이죠. 물론 NC센터는 그 목적을 보았을 때 어린이집이나 늘봄학교가 아닌 보육원의 기능이 훨씬 강화된 곳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국가가 아이의 보육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보육 수당, 늘봄학교가 떠올랐습니다.
3. 가족에 대한 개념 재정의
이 책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볼 점을 던져준다는 것입니다. 열다섯 살에 센터를 떠났다가 반년만에 다시 돌아온 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에 겨운 새끼들이지. 낳아서 키워 주고 돌봐 줬는데 부모가 귀찮다? 나쁜 자식들이야, 진짜.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p41)
부모는 선택할 수 없는 '주어진' 가족입니다. 부모 역시 나의 이상에 꼭 맞는 자식을 선택할 수는 없으나, 부모는 자식을 낳을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페인트》에서는 아이도 한 번의 홀로그램 면접, 두 번의 대면 면접, 한 달간의 합숙을 거쳐 부모를 선택합니다. 가디는 NC 아이를 최상의 프리 포스터와 매칭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인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더욱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처럼 느껴집니다. 하나 역시 제누에게 부모가 아닌 친구가 되어주고자 합니다. 저는 아직 부모는 아니지만, 자식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 자식 간에 친구 같은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NC 센터의 아이와 NC 센터를 찾은 프리 포스터와의 관계를 보면서 부모 자식 간에 수평적 관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만이 원하는 아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도 원하는 부모상이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아이를 자신의 입맛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나는 좋은 부모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한 소설이었다고 하니 더욱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부모에게는 부모대로, 청소년에게는 청소년대로 각자 다른 울림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4. 책 속에서 찾는 해답
그렇다면 가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책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가디에게서 보는 부모의 모습
박은 아버지의 가정폭력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박의 이런 상처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최고의 부모를 소개해주고 한 단 한명의 아이도 아프지 않도록 하는 데 애쓰는 힘이 되었죠. 그리고 아이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프리 포스터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최 역시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박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제누가 합숙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너를 더 알아 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2) 아이들에게서 보는 자녀의 모습
아키는 사랑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밝고 사랑이 넘치는 아키는, 역시 사랑이 가득하고 인자한 부모님을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입양되었다가 NC 센터로 되돌아온 노아는 통제를 싫어한다. 노아에게는 노아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소통하는 부모가 필요할 것입니다.
제누는 자신이 말할 때 "아, 그래? 그럼 다른 걸 해볼까?"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제누에게 해답을 제시하는 부모가 아닌 생각의 길을 열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부모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나와 해오름은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지라도 제누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 같았는데, 제누는 사회의 편견에 맞서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네요. 후속작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후속작이 궁금한 이유입니다.
5. 아쉬웠던 점
사회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습니다. 아키처럼 사랑이 넘치는 사람도 있고, 노아처럼 겉으로는 반항기 넘치는 사람도 있고, 박처럼 진심으로 자기 직업에 임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와 해오름처럼 독특한 듯 철이 없는 듯 한 사람도, 아키의 프리 포스터처럼 따뜻한 사람도 있습니다. 제누 역시 제 나이보다 성숙하고 사회의 차별과 맞서려는 깨어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저는 제누가 왜 하나와 해오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와 해오름에게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아서? 자신이 남다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다른 사람에게 끌렸을까? 그렇다기에는 제누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같은 NC센터에 있음에도 제누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생각이 많고 깊은 아이인 이유가, 어떤 과정으로 주관이 또렷한 아이로 자랐는지, 왜 자신이 말할 때 "아, 그래? 그럼 다른 걸 해볼까?"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를 원하는지에 대한 서사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키도, 박도, 최도, 전체적으로 평면적인 인물들로 소설이 구성되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또 제누가 세 번이나 페인트를 하고도 합숙은 하지 않았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김이 새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와 해오름은 제누가 지금껏 면접을 통해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이상적인 부모였음에도 불구하고 NC센터에서 더 배우고 생활하고 싶어서라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NC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앨 수 있는 건 오직 NC 출신밖에 없기에 자신은 NC 출신으로 남겠다는 것도 조금은 급작스러운 전개로 느껴졌습니다.
6. 재미있었던 점
앞서 이야기한 굵직한 내용들과 달리 소소하게 재미있었던 점은 이토록 체계적으로 보이는 미래 사회에서도 실적 압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누 301이 있는 NC센터의 센터장 박은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아무 프리포스터하고 연결시켜주지 않습니다. 박의 마음씨 덕분에 전국에서 실적이 가장 낮은 NC센터일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서 본부에서는 프리 포스터들을 위해 심사의 문턱을 낮추라고 했다는 것도 현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금아이》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원고의 마지막 온점을 찍는 순간 다짐했다. 이 이야기는 절대 세상에 내보내지 말아야지. 폴더에 넣어 두고 혼자만 읽어야지. 이수와 세아는 그렇게 만나야지 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아이는 어느새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금아이》 작가의 말, p228)
《페인트》 작가의 말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경우 "나는 참 부모 자격이 없구나." 하는 푸념 속에서 제누와 아키, 노아가 찾아왔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갔다면 훨씬 근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고 미안하다. (《페인트》 작가의 말, p200)
소설을 쓰고 인물을 창작하는 데 이희영 작가님이 어떤 마음일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주관적인 평점: ★★☆
★★★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
★★☆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
★☆☆ 굳이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
그러나 나쁜 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