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순
저자: 양귀자
주제분류: 소설
출판연도: 1998
25살의 안진진은 결혼적령기에 놓인 여성이다. 쌍둥이인 엄마와 이모가 결혼 이후 다르게 사는 삶들을 지켜보며 자신은 나영규와 결혼해야 할지 김장우와 결혼해야 할지 고민한다.
1. 결혼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면
친구의 청첩장에 《모순》의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p210)
저도 안진진처럼 결혼 적령기에 놓여있습니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있고요. 시대가 바뀌어 안진진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다른 점이네요.
하지만 결혼 말고 내 삶의 부피를 늘려줄 만한 어떤 일이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빈약한 인생을 걱정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결혼에 빠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p18)
지금의 제 인생을 사랑합니다. 현시대의 여성답게 결혼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함으로써 인생의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고 따라서 결혼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지라, 책을 읽으면서 마치 안진진이 아닌 내가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인 듯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p165)
1) 나영규와 같은 남자
나영규는 현실적이며 계획적이고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결혼하기 좋은 남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영규는 안진진을 자신의 인생 계획 중 하나인 결혼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본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나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준비한 크리스마스 계획이 뭉개지고 말 어떤 중대한 사정이 저 안진진이라는 여자한테 일어났으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을. 그것은 나 안진진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준비를 거친 오늘의 약속이 취소될 것을 더욱 근심하는 조바심이었다. (p265)
나영규는 안진진을 생각하며 데이트 코스를 짠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데이트 코스를 짰어!'라고 자랑하듯 안진진을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갔고, 언제나 안진진에게 자신의 말을 하는 쪽이었고, 결국 안진진이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취소했을 때는 안진진을 걱정하는 대신 자신의 계획이 뭉개지는 것을 명려하는 사람입니다.
2) 김장우와 같은 남자
김장우는 나영규와 딱 반대되는 사람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지만 낭만이 있는 남자입니다.
"이유야 또 있지. 안진진이 있잖아.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같이 웃어주고 쉴 새 없이 숨소리를 내는 안진진이 있어서 순간순간이 충만할 텐데 뭣 때문에 카메라를 가져오겠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랑하는 꽃 이름을 부르는 대신 안진진의 이름만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했어." (p194)
또 김장우는 (심리적으로) 기댈 수 있는 남자입니다.
나는 다만 나란히 숲길을 걷고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을 확실하게 좁혔을 뿐이었다. 어개가 맞닿았으므로 손을 잡고 걷기는 불편했다. 적절하게도 김장우는 그 순간 내 어깨에 팔을 둘러 우리의 자세를 확실하게 조절했다. 나는 그에게 기대어 숲 향 그윽한 오솔길을 걸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중이었다.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p194)
하지만 김장우는 형과의 관계가 너무나도 끈끈해보였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안진진보다 형이 언제나 먼저일 것 같았습니다. 형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형에게로 달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3) 그래서 나영규 vs 김장우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p194)
저는 도저히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영규와 결혼하면 경제적 고민은 상대적으로 없을 것이고 남보기에 걱정 없어 보이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속에 '나'는 없고 그의 기준에 맞춰진 '아내'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장우와 결혼하면 그와 '나'는 함께 어깨를 기댈 수는 있겠지만 현실의 벽을 고스란히 마주할 것 같았습니다. 또 저는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지만 제 자신이 그런 부류의 아니기 때문에 김장우와 같은 사람을 배우자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나보다 형이 먼저일 태도가 싫었습니다.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하려고 해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현시대를 사는 여성이니 사는 것을 택해야겠습니다.
이 책은 98년도에 쓰여진쓰인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되었고 공감됩니다. 삶에 대한 고민은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5살의 안진진이 결혼 적령기라는 점에서, 인물들이 모두 결혼적령기에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아, 이 소설이 98년도에 쓰인 것이구나.'를 느낍니다.
지금이라면 안진진도 나영규와 김장우를 저울질하지 않고 혼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않을까요? 소설 속 안진진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습니다. 사실 나영규도 지금이라면 혼자 사는 것을 결심할 수도 있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2. 엄마와 이모의 삶
어쨌든 소설 속 안진진은 결혼을 원했습니다. 안진진이 나영규와 김장우 두 남자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엄마와 이모의 삶을 너무 가까이서 지켜본 탓에 당연한 수순인 것도 같습니다(그런다고 해서 양다리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얼굴도 성격도 학교 성적까지도 똑같았던 일란성 쌍둥이 엄마와 이모가 결혼으로 다른 인생을 걷게 되었습니다.
1) 엄마의 삶
김장우와 결혼한다면 엄마와 같은 삶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안진진이 김장우에게 더 마음이 있었다는 점에서, 보고 자란 부모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이 조금은 소름 돋았습니다.
2) 이모의 삶
나영규와 결혼한다면 이모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겉보기에 이모는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차지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모는 불행했습니다. 이모는 엄마를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안나 카레리나의 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리나》 중)
엄마와 이모가 서로 바꾸어 결혼을 해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결국 똑같은 결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만 엄마의 결말이 이모의 결말이고, 이모의 결말이 엄마의 결말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진진이 이모의 딸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성장 배경에 따라 안진진이 지금과는 다른 어른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모와 안진진 모두 지금보다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모와 안진진은 확실히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안진진은 이모와 통했습니다.
언젠가 큰 눈이 내리면, 머리에 하얗게 눈을 이고 이모를 찾아가야지. 이모는 아마 깜짝 놀라겠지.
진진아, 나, 이 선물, 죽을 때까지 영원히, 영원히 보물처럼 간직할 거야. 꼭 그렇게 할 거야...... (p240)
그리고 이모도 안진진과 통했습니다. 안진진보다 자신의 자식을 더 사랑했지만 그래도 이모가 마음을 나눈 사람은 안진진이였다고 생가합니다. 이모가 안진진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 것도, 너무 나쁘고 이기적이었지만, 그래도 이모로서는 가장 마음을 주었던 사람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모의 선택을, 마음 아프지만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이모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불행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언니의 치열한 불행을 부러워했던 것이 아닐까요.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이 책의 제목이 '모순'인걸요.
3. 인생에 관한 만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많나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p15)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p106)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p127)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p295)
4. 사랑에 관한 말들
그리곤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황망하게 돌렸다. 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p104)
창가 자리에 앉는 행운을 누린 연인들은 유리창에 코를 박고 넘어가는 여름 해의 주홍빛 흔적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실내를 떠도는 음악은 누군가의 바이올린 연주가 빚어내는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였다. 여기저기 속삭임은 감미로웠고 나지막한 웃음소리들은 물방울 터지는 소리 같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저들은 추억할지도 모른다. 그날 오후, 우리는 그곳에서 사랑의 인사를 나누었다고. 그날 오후는 정말 아름다웠다고. (p116)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p210)
5.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 (스포 주의)
1) 솔직해지지 못하는 사랑
안진진은 나영규 앞에서는 엄마에 대해서 동생에 대해서 다 말합니다. 하지만 김장우에게는 이모를 어머니라고 속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에 대해 말하기를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김장우를 사랑하기에 김장우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고 이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힘과 사랑의 자존심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이 정말 사랑일까요.
2) 조폭인 동생의 삶을 안진진과 엄마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안진진의 동생 안진모는 조폭입니다. 그런데 안진진도 엄마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묵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와 책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우리 어렸을 때는 뮤직비디오에 조폭이 많이 나왔던 것처럼 그때는 지금보다는 조폭이 흔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책에서도 진모는 동네 똘마니 몇 명을 데리고 조직 보스 흉내를 낸다고 하기는 했습니다.
3) 안진진과 엄마는 그런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오랫동안 가정을 버리고 제멋대로의 삶을 살다가 병을 안고 그제서야 가족에게 염치없이 돌아온 아버지를 안진진도 엄마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4) 안진진이 나영규와 결혼한 것
자신에게 없었던 것을 선택하여 나영규를 선택한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서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 친구든 배우자든 다른 사람을 사귀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의 계기가 이모의 죽음이었던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모의 죽음을 보고도 같은 길을 선택한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간다... 이 모순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6. 10년 뒤에 다시 읽고 싶은 책
제목처럼 읽는 매순간 순간이 모순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안진진의 삶은, 안진진의 엄마와 안진진의 이모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끊임없이 모순을 담고 있는 문장들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냈습니다. 10년 뒤에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10년 뒤면 저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이 책 속 안진진의 생각들과 나영규, 김장우의 성향이 어떻게 다르게 보일지 궁금합니다. 10년 뒤에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지금과는 다르게 읽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다르게 읽힐지가 참 궁금합니다.